( 인터넷 생활의 체크포인트겸 그냥 옛 생각이 나서 적습니다, 앞으로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고... 글의 전체적인 말투에 먼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에 닉네임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서론이 본론보다 더 긴것 같군요 --; )
( 그런데 적고보니 진짜 기네요, 압박이 심할듯 하옵니다.. )
The Root생각해보면 본인은 나이에 비해서 컴퓨터를 일찍 접한것 같다. XT와 286, 하드없는 컴퓨터를 5.3 인치 플로피 부팅 디스크를 넣고 컴퓨터를 켜고 프롬프트가 뜨면 게임 플로피 (테스트 드라이브1을 많이 한 기억이) 넣고 게임을 즐기던 시절. 국민학교 들어가기전부터 집에 컴퓨터가 있었던덕에 게임을 좀 한적이 있는데 아마 시기는 90년도 초였던것 같다. 그 외에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만나면 2인용짜리 게임이 없었기에 프롬프트 화면에서 커서를 중간에 놓고 한명은 스페이스바를, 한명은 백스페이스를 두들겨서 누가 먼저 끝까지 가나 경쟁을 하는 'Beat the Space' 로도 컴퓨터란것이 즐거웠던 시절이다. 대충 국민 1학년/2학년 시절에는 컴퓨터를 업글해서 흑백뿐만 아니라 희밋한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도 있었더너 게임이 어슴치레 기억이 나는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때 기억은 못하겠더라~
그러다가 국민4학년때쯤이었나, 93년? 94년? 뉴텍이라는 현재는 망해버린 컴퓨터회사에서 전국에 보급적으로 486 머쉰을 퍼뜨린것 같다. 매주말마다 컴퓨터를 새로 사는 애들이 반에서 3명씩이나 됐다, 거의 모두가 컴퓨터를 갖기 시작할때쯤이었는데 컴퓨터에 고인돌이라던가 이런 몇몇 게임들이 깔려있고 그럴때였던것 같다. 3.5 인치 플로피를 20장씩 들고 다니며 친구들과 게임을 교류하고 그러다가... 친구컴에 3.5인치 플로피가 없을때는 좌절했었는듯.
그때 겜카피라고 하면 빼놓을수 없는데 arj 압축이었는데 (요즘은 rar zip 이지만) 왠만한것들은 다 나눠서 압축해도 무슨... 16메가짜리 파일이 하나 등장하면 게임을 카피해갈수 없었던게 충격이었다. (그 16메가짜리 겜을 생각해보니 Mech Warrior 1이군) 그런데 뒤늦게 arj 명령어중 한파일을 1.4메가로 잘라서 여러 파일로 다수 압축 시킬수 있다는걸 알아냈을때 너무 기쁜 나머지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보물1호처럼 간직했었다.
아 그리고 그당시 빼놓을수 없었던게 있었다면 M 이라는 유틸. 언제나 프롬프트에서 dir 을 쳐서 파일목록을 보곤 했는데 엠을 이용해서 간단히 파일들을 선택 복사 실행 할수 있었던것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alt+a 를 이용하여 몇몇 파일을 감추고 보이게하고 하는것도 친구들 사이에서 지존으로 만들수 있는 트릭이었다 -_-;;;
1995뭐 맨날 밖에서 놀다가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면 컴터 게임을 같이하다가 부모님께 꾸중듣고 그럴때였는데, 한번은 컴퓨터에 대박 빠지게 만든 게임이 있었다. 커맨드앤 컨쿼1이였는데, 인스톨 화면에서 감격, 미션 사이사이마다 한두개식 들어있는 동영상에 너무 빠졌었다. 그때 커퀀을 토대로 만들었던 종이 말판 게임등은 2001년까지 꾸준히 제작했을 정도로 라이프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개념을 통째로 바꿔줬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씨앤씨군단이란것도 만들어 놀았고, 커퀀에 대한 지식을 묻는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등 별별걸 다 만들었었다. 아직까지도 커퀀은 본인에게 강력한 존재이다.
이때부터가 슬슬 컴퓨터에서 wired networking 으로 넘어갈때였다. 그 당시 친구들과 한 키보드에 손 4개를 얹고 같이 하는 2인용 게임들이 역시 사교의 최고수단이었는데, 커맨드앤컨쿼같이 1인만 즐길수 있는 게임은 친구들 여러명이 놀러왓을때 충격적이었다. 물론 1명만 놀라와도 한명은 계속 구경만 해야 한다는게 에러였다. 그런데 친척형이 엄청난것을 하는걸 보았다... 바로 모뎀을 이용한 1:1 네트워크 멀티플레이! 그것을 보고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이런 게임을... 친구와 대항할수 있다니, 이건 전혀 다른 세상이다. 물론 그땐 28k 모뎀만 있어도 부르부르에 접속률 와방을 자랑했으며 전화가 걸려오면 모뎀이 툭툭 끊겼다. 모뎀으로 접속하고 한명이 호스팅으로 기다리고 한명이 ip접속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핸드폰같은것도 없었고 모뎀으로 접속하면 전화도 할수 없었으니 그 타이밍을 잡는다는건 엄청나게 힘들었다. 30분에 한게임을 간신히 시작시킬정도이기도 했는데 겜 시작하고 5~10분이면 한명이 꼭 접속이 끊겼었다. 그래도 그 전까지 한 5분의 게이밍은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몇시간이라도 자랑을 할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통신모뎀이 귀중하던 그 시절, 또 나는 새로운 문화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터넷 통신이였다. '뚜--... 띠디디디딕 (대략 2초간 침묵) 치지지지직' 하면서 어딘가에 접속하더니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들어가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게시판에서 보고 자료를 다운 받더라. 너무나도 놀라웠다. 특히나 친척형이 받았던 커맨드앤컨쿼에디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가 가장 강세였던것 같은데 본인은 하이텔과 천리안을 했었다. 그런데 친척형이 쓰는 나우누리에 자료가 가장 많은것 같아서 그걸 신청해달라고 졸랐지만 해주시지 않았다. 여튼간 통신이라는 위대한 존재를 구경하고 잡지에서 새로 나오는 8배속 cd롬 드라이브와 56k 모뎀 광고를 보며 그걸 뜯어 코팅해가지고 학교 책받침으로 쓸 시절 인터넷은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아버지 : "미래에는... 이제 인터넷이란게 발전할거야. (네트스케이프를 꺼내 보이시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즐기고... 교육에 쓸수 있겠지..."
본인 : "에이 이런걸로 뭘 어떻게 해요... 몇십년이 지나도 나우누리같은 통신이 짱먹을꺼예요 ㅋ..."
이 말을 한 이후 2년도 안되서 사람들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켜고 있었지 파란 배경의 통신에 치지직 거리며 접속하고 있지 않았다.
베틀넷[ 이때부터는 초5에서 중1~2가 될때쯤으로 2000년...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
경험과 접촉을 제외하고나면, 슬슬 인터넷 문화를 즐기게 된건 스타크래프트가 나올때쯤이었던것 같다. 본인은 사실 초등학생이었고 부모님께서 본인이 1주에 컴퓨터 앞에 2시간 있는걸 허용하시지 않으셨기에 (평일은 구경도 못했고 주말... 토요일밤이나 친구 놀러왔을때만 1시간씩 했다) 실제적으로 통신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못했었다. 그러고나서 차츰 나중에는 평일에도 밤에 1시간정도씩 컴퓨터를 할수 있게 됐는데, 그때 프리베틀넷에서 게임을 하기 시작할때였다. 게임방이란건 서울에서도 찾기 힘들정도로... 막 생겨나기 시작했고, 지방에는 물론 없었다. 고속 인터넷 같은것도 없었고 56k 모뎀만 있으면 그 동네에서 신기술을 달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프리베넷중 하나 (그 이름을 까먹었다) 에서 놀기 시작했는데 그때 소속해있었던 [CAR]길드를 위해서 웹페이지 만드는것과 포토샵 쓰는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본인이 여태까지 만든 30개가 넘는-_-; 자잘한 사이트들중에서 가장 처음 만든 홈페이지가.. 물론 가장 추했지만 플래쉬등 별별거러 다 쓴 하이테크 홈페이지였던것 같다.
아, 그리고 덤으로 뒤를 돌아보니... C&C1 공략집을 위해서 구해뒀던 게임피아 98년도 매거진끝에 End of Evangelion 에 대한 기사와 대사록이 실렸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때 그게 도저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결말은 어떤것인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그때 에바 TV판 자체도 전부 보지 못했었기때문?; 아니 게다가 한화 19메가되는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다운 받는건 6시간이 넘었기에 중간에 끊기고 그래서 뭘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비디오 대여점에 등장한 에바는 몇년 후였던걸로..
중학교를 들어가던 1999년 2000년쯤, 지방에도 게임방과 인터넷 전용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충청북도에 살고 있던 본인은 역전에 있는 도시 유일 게임방에 가기 위하여 친구들 5명과 주말에 약속을 잡고 버스를 2번 갈아타며 30분씩 가서 겜방에 갔다 왔었다. 지금은 집에서 밖으로 나와 3분 안이면 어느 겜방이라도 걸어갈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 초등학교 끝나갈무렵 열심히 스타를 해서 중학교 들어가서 전교 1등을 했던것은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런저런일이 있고 몇일후 어느 게임방 아들놈이 3:3 스타 챌린지를 걸어왔다. 자랑스러운 친한 친구들 (길원)과 그쪽 겜방파 3명과 3:3을 해서 우리가 이기면 겜방측에서 공짜로 해주고, 우리가 지면 가격을 2배로 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단순한 애들 내기전이 아니라 그 녀석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_-;
그런데 그때 경기에서 졌었다. 그때는 분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진것 같지도 않다. 그때 그 녀석은 난 처음보는 '무한맵'과 '초반 20분 러쉬 없슴'룰을 제안했었다. 본인과 친구들은 래더맵에서 하듯이 차근차근 뽑아가며 적진 앞에서 손을 빨고 있을때 그 쉑일당은 가디언을 200/200까지 뽑고 있었으니까 -_-; 물론 맵의 반은 차지하는 성큰콜로니도 잊을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시 진것 같진 않다. 그 룰을 승락한것만 멍청했지만 그런건 상상도 못했으니 어찌 아랴...
그리고 2000년 여름에 나는 미국으로 공부차 옮기게 되었다. 그때 1999년 말부터 한동안 리니지에 빠져있었는데 정말 폐인될뻔했다. 미국에 오게되면서 끊게된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한다. 리니지 얘기가 나와서 다시 생각해보는건데, 그때 신섭 캐스톨 서버란곳에서 궁수를 키우고 있었다. 그때 서버에서 가장 레벨이 높고 pk 를 많이 한 사람의 이름이 "강간" (여자 덱엘프 궁수) 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헉 강간-_-;;;" 이러고 있었는데... 진짜 농담이 아니라, 난 그때 '강간'이 뭔지 몰랐다...
닉네임이제 드디어 본론이다. 인터넷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건 미국에 와서였다. 미국에서야 미국인들과 일단 방과후 노는 컬쳐도 틀리고 작은 동네에 있었으므로 한국인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케이블 인터넷은 있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으로 사람들과 얘기하고 커뮤니팅을 하는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몸을 유혹했다. 아마 다른 해외파분들도 비슷했으리라 믿는다. 한국에 있었다면 밖에 돌아다니면서 친구들과 놀았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럴 친구가 별로 없었고 있어도 시간투자가 크지 않고 미국이란 곳자체가 차가 없으면 놀수 없는 곳이기때문에 중학생 신분인 본인에게는 인터넷밖에 사람들과 말할곳이 없었다. 아 그리고 미국에 처음 갈때 한국 학교 친구들로부터 하루에 메일이 58여통이라는 무지막지한 숫자 (스팸 메일같은거 아니였다) 로 날라왔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한메일뭐 이런애들도 서버 자체가 불안정했는지 답장을 꾸준히 써도 몇장은 중간에 미싱이 되버린다. 그래서 결국 소식 두절로 반년만 지나니까 이틀에 한두통 올까 말까더라. 물론 양쪽에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답장을 보냈는데 너가 답이 없었어" 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그때부터 인터넷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인터넷에서 무슨 닉네임을 써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때다.
일단 통신시절에는 실명을 썼었다. 그리고 다른 왠만한 사이트에서도 그저 본인의 아이디 chotree7을 썼었다. 초트리인 이유는 본인의 실명이 '조남우' 이기때문인데 조의 Cho 와 남우가 나무→Tree 가 되서 초트리에다가 럭키넘버 7을 붙여서 만들게 된것이다. 현재도 많은 사이트들에서 쓰는 아이디이다.
하지만 닉네임은 별개였다. 이제 실명유저도 줄어들기 시작하고 매우 단순한 cnw86 이런식(자기 실명 3글자의 영어 이니셜과 생년도 2숫자)의 닉네임과 이메일도 줄어들고 사람들마다 각자 개성있는 닉네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인도 고민했다... 과연 뭘 쓸까?
그때 본인은 모든 사이트에서 다른 닉네임을 썼었다. 예를들어 밀리터리 사이트라면 밀리관련 닉네임을, 과학 사이트라면 다른 과학 관련을, 판타지 게임이라면 판타지풍의 닉네임을, 이런식으로 다르게 쓰고 있었다. 그래도 실제로 요즘같은 개념의 "동호회 활동"을 하는곳은 특별히 없었는데 가장 처음 죽치고 지내기 시작한곳이 네이비필드라는 게임의 사이트였던것 같다. 베타도 아니고 거의 알파 시절이었던 게임인데, 서버에 유저가 6명이 접속하면 서버가 다운되는둥 문제가 좀 많던 극초기 시절이었다. 그때 몇몇 밀리터리 팬들과... 다른 많은 분들께서 게시판에서 활동하셨는데 그때 본인도 등장해서 좀 지냈다. 기억에는 대충 2001년말에서 2002년 초였던것 같은데 1달에 글을 약 350개 정도 적어냈으며 아직 알파기간에 있는 게임의 팬페이지를 만들었으며 리플수는 정말 괴악하게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_-;;; 운영자나 기획자분들과도 메신져로 맨날 말하고 그럴 정도였으니 네필이라는 게임의 커뮤니티에서는 꽤 깊이 들어갔던것 같다. 주변에 있는 형들이 운영자로 선출되고 게임 개발자로 들어가고 그럴때였으며 어느분은 게임 일러스트레이터였으니 사실 그때 네필을 하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게임 관계자였던것 같다 -_-;; 본인도 SD엔터넷에서 미국 E3 쇼에 처음 나올때 마케팅 부스를 맡을수 있겠냐는 말도 들을정도였지만 역시 학생이라 시간도 안되고... 차가 없어서 캘리포니아까지 내려갈수가 없었다. 그때 초기에 쓰기 시작했던 닉네임은 Swat. 실제 스왓팀을 멋있게 본것도 있으며 그때 레인보우식스를 즐겼었고 강력하게 공격하자는 의미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 크게 활동한 두곳이라면 네필사이트와 워크래프트 사이트인 워게이트와 기타 사이트였다. 그때 워크래프트도 워크 어드벤쳐 (제작하다말고 중간에 치우고 전략게임 워3로 진보됐으며 그 워크어드벤쳐게임은 현재 와우의 토대이다.) 에서 망하고 막 전략게임으로 넘어갈 시절이나 베타 시작하기도 1년은 전이었을것이다. 그때 워크관련 사이트가 전국에 3개도 안됐으며 본인과 지인들이 만든 클랜은 국내에서 생긴 3번째 길드였을것이다. 첫번째가 빅터였고, 두번째가 아제로스 길드였고 3번째 국내 워3길드는 레이더즈 클랜이었다. 게임이 베타시절을 거칠때 빅터와 아제로스가 합쳐지고 게임이 나오고 얼마 안되서 길드명 변경이 되더니 없어진것 같다. 고로 현재 본인의 클랜은... 알파시절때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와 글들이 남아져있는 국내 최장 워크 길드라고 생각한다 -_-;;
Change잠깐 이야기가 샜는데, 어쨋던 다시 돌아오자면 이 시절부터가 본인이 인터넷에서 한개의 닉네임으로 통일했을때였다. Swat. 그런데 너무 건성으로 지어진걸 쓰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신중히 고려해볼 여지가 있었다.
그때 그래서 만들어진것이... Katsuragi 였다. 카츠라기가 된 이유는 한 4~5개의 이유가 중첩되어 있었다. 일단 먼저, 워3 클랜쪽으로 돌아가자면 베타시절까지 Swat 란 닉네임을 쓰다가 정식이 나와서는 Eternity (불멸)라는 닉네임을 이용하였다. 그때 로데론(US West)서버에서 하고 있었는데 서버 접속 문제도 있었고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국내 경기는 Kalimdor(Asia)서버의 길드만 취급한다고 그러는 바람에 거의 모든 한국 길드가 아시아섭으로 옮겼었다. 그때 레이더즈 클랜도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 바꾸게 되었다.
( 사이드 스토리이지만... 그때 Eternity 를 쓸때 한국방문할때 첫 정모를 개최했었다. 그때 동생들 형들 누나가... '이터..'라고 불렀는데 이거 아무리봐도 Eater 였다 -_-; 어감이 전혀 좋지 않더라 )
카츠라기가 된 이유들을 모으자면... 일단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의 '미사토 카츠라기'라는 캐릭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애니 케릭터중 가장 좋아하는걸 꼽으라면 저 케릭터인데 그 성을 따게 되었던것 같다. 게다가 애니에는 등장한적 없지만 카츠라기 박사(미사토의 아버지)가 과학자였다는것도 어필이 됐을지 모르겠다. 일단 이건 작은 이유중 하나고... 다음은 네필(네이비필드). 그때 같이 친하게 겜하던 형님들께서 일본함 그룹을 만든적이 있었다. 무사시, 히류, 소류 이런식으로... 그때 뭘로 할까 쭉 보고 있었는데 운류급 항공 모함의 자매함인 카츠라기라는 항모가 있었다. 아는 동생과 자매함 시리즈를 만들다가 저걸 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워크, Eternity 란 닉네임을 쓰다가 아시아 서버로 넘어가면서 Katsuragi 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 '카츠라기'라는 닉네임을 후보리스트에 올려놓고 연구할때 일본 사이트에서 카츠라기란 불멸을 의미할때 쓰이기도 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었다. 마침 쓰던 Eternity 란 닉네임과 의미가 같아지기에 바꿔 쓰게 되었다. 그외에도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건 사정상 밝힐수가 없다.
어쨋던, 수많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이건 운명이다!'하며 카츠라기라는 닉네임을 쓰게 되었다.
그 이후에 간단히 '카츠(Katz)'로 줄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도 여러개이지만 주 이유를 곱자면 일본에 대한 회의감이 생기기 시작할때였다. 다른건 다 개방적이어도 이쪽방면으로는 보수적인 생각을 지녔어서인지 왜 내가 내 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바꿔먹고 활동하려고 하는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나는 일본인처럼 불려도 되는가등등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몇주 고민하게 되었고 대대적으로 닉네임을 바꿀것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짧게 카츠라고 불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리고 이미 Swat 에서부터 두세번 바뀌며 카츠로 바뀌었기에 또 바꾸는게 왠지 인터넷으로 아는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히 뒤에 '라기'를 잘라서 카츠라고 했다기에는 너무 또 무의미한 이름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KATZ 는 두문자를 이용한 (頭, acronym) 4단어가 들어간 문장의 이니셜이 되었다. 이미 부르는 사람들도 그대로 부를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KATZ의 풀이가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해주는 뭔가 거창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럴싸하게도, 그 문장이 저 두문자들을 이용하여 설명이 되더라. 물론... 그 풀이 문장은 아무에게도 알려준적이 없다. 예전에 어릴때 이 아이덴티티를 이용하여 뭔가를 말하다가 목숨을 잃을뻔한적이 있었기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조심하고 있다.
이 카츠라는 명은 지금 몇년이 넘도록 써오고 있는데, 그러는 동시에 어느샌가 나는 또 다른 명을 부명으로 만들어 일부적인 곳에서 이용하고 있다. 그 이유라면 인터넷에서 만들어 쓰는 닉네임만큼 뭔가 확실하게 '나다' 라는 유니크함이 있어야 하는데 '카츠'란 명은 이미 너무 많이 쓰이는것 같았다. 내가 알기로는 이글루에만해도 본인을 합쳐 카츠가 3명일것이다. 카츠뭐뭐하는 식을 짧게 '카츠'라고 부르는것까지 합치면 더 있을 것이고. 게다가 본인은 한국 사이트말고 다른 외국 사이트들에서도 활동을 하는데 Katz 는 몇분들은 아시다시피 독일어로 고양이이다. (Katz? Katze?) 그래서 외국 사이트로 나가보니까 카츠는 더더욱 많더라, 그래서 또 한번 크게 변경을 고려하게 되었다. 게다가 인터넷 활동에 대한 인식이 몇년전에 비해 꽤 많이 뒤틀려있기때문에 간혹 완벽하게 청산을 새로 캐쥬얼한 시작을 할까 생각도 하지만 여태까지 놓아둔것의 정리가 너무 힘들고 아직도 머리아픈 일이라 고려단계에 있다.
카츠외에 다른 닉네임을 살짝 공개하자면 Hellmarch 와 ShiverSky 이다. 전자는 좋아하는 C&C 시리즈의 명곡 헬마치에서 나온것이며 단순히 헬이 들어가서 악마같은 분위기보다는 남성답고 씩씩한 모습을 보이자는 이념에서 후보로 올리게 되었다. 후자인 ShiverSky 는, 짧게 SS인데 본인의 실명을 뜻풀이해서 영어로 포현하면 SS라는 이니셜이 나오기때문에 본인이 닉네임을 연구할때 S 두개를 써먹는걸 많이 고안했었다. ShiverSky 는 뭐 직역하면 얼어붙는, 덜덜떠는 하늘로 하늘은 냉혹하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자기 알아서 스스로 그걸 버텨 생존해야 한다, 자신은 자기가 살려야한다와 현실관에 대한 시니컬함과 비관적인 눈이 합쳐져 뽑게 되었다. (그래도 생활만큼은 긍정적임을 추구한다^^ 세상의 불행을 다 짊어진듯하게 한숨쉬며 사는 인간의 모습도 꼴보기 싫어하기때문에. 정신은 깨어있되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현실적으로 세상을 살자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외국 사이트 몇몇개에서는 이용하고 있으며, Shiversky 이걸 이용하여 부르는 한국 사람들은... '시발새키'라고 부르기때문에 재심의 상태에 들어가있다 -_-; 언제한번 싹 정리하고 싶긴하지만.. 역시나 몇년동안 쌓이는 것이고 다시 바꾸는것도 늘 신중히 고려해야 하기때문에 이쪽 방면으로 최근 생각이 많다. 물론 저 둘다 모든 검색엔진과 기타 포털사이트/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하여 이미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체크를 마친 상황 -_-;;
닉네임 정하는거 하나가 마치 세상을 좌우하는듯하게라도 생각하는 어느 한 네티즌의... little biography ends here.